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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에 두번 고향 갈때, 어쩌다 한번 허리띠 풀때 꼭 들르던…

다음의 글은 2014년 4월 4일 문화일보에  ”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40401033130025002

 

1994년 10월 21일 아침. 출근과 등교로 부산한 시간에 청천벽력 같은 뉴스가 터져 나왔다.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는 것이었다. 삼풍백화점 붕괴, 대구지하철공사장 가스폭발 등 유난히 사건사고가 많던 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을씨년스러운 풍경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일 확인된 사망자 32명은 대부분 버스를 타고 강남에서 강북으로 등교 또는 출근하던 사람들이었다.

이 사고는 박정희 시대의 마구잡이식 건설이 빚은 대표적인 참사로 꼽히면서 한국인들로 하여금 한동안 외국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 사고의 여파들 중에는 눈에 잘 띄지 않는 것이 한 가지 있었다. 사고 직후 성수대교를 건너 강남북을 잇는 버스 노선이 폐쇄되면서 마장동 축산물시장이 강남쪽 고객을 완전히 잃고 말았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압구정동 등의 강남주민들은 이 다리를 건너 마장동시장을 곧잘 이용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성수대교 붕괴는 이 시장에는 생명선의 단절이나 다름없었다. 소매시장으로서 결정적인 타격이었다.

그것은 1997년 새 다리가 놓인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고개 돌린 강남 고객들은 다시는 마장동시장을 쳐다보지 않았다. 마침 쇠고기 소비패턴 자체가 바뀌던 시점이기도 했다.

지금도 50대 이상 중장년층의 기억 속에서 마장동시장은 서울, 아니 이 나라 전체를 통틀어 대표적인 축산물시장이다. 1960∼1970년대에 쇠고기 또는 돼지고기를 사는 데에 여기만큼 품질 좋고 저렴하며 선도가 좋은 곳은 달리 찾기 어려웠다. 설날이나 추석에 동마장 시외버스터미널(1968∼1989)에서 귀향하는 사람이라면 이곳 마장동시장에 들러 쇠고기 한 손이라도 사가야 제격이었다. 신문지에 둘둘 말려 한 나절 덜컹거리는 시외버스에 실려 온 쇠고기 표면에는 흑백 신문기사가 좌우가 바뀐 채 선명하게 찍혀 있곤 했다.

이때가 소매시장으로서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전성기였다. 물론 동네마다 정육점이 한두 군데씩은 있었지만 서울 동부지역의 시민들이 집에서 이런저런 잔치를 치르거나 제사상을 차릴 때면 이곳을 제일 먼저 떠올리곤 했다. 곱창이나 사골 같은 부산물을 구입하기에도 아주 그만이었다. 지방질을 제거하고 바로 요리할 수 있는 수준으로 손질까지 해주니 더 이상 편리할 수 없었다. 개발연대에 ‘마장동’은 1년에 몇 번 없는 ‘잘 먹는 날’의 상징이었다.

재래시장이란 본래 생일이 불분명한 법이다. 자연발생적으로 생기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마장동시장은 아주 선명하게 생일을 갖고 있다. 1961년 8월 31일이 그날이다.

그보다 3년 앞선 1958년 우시장이 동대문구 숭인동(현재의 숭신초등학교 자리)에서 이곳 성동구 마장동(현재의 마장현대아파트 자리)으로 옮아온 데 이어 이날 우시장 바로 옆에 ‘동양 최대’의 ‘현대식’ 시설을 갖춘 서울시립 도살장(현재의 마장초·중학교 자리)이 문을 연 것이다. 우시장과 도살장이 나란히 자리 잡으면 그 옆에 무엇이 들어서겠는가? 그 도살장에서 공급되는 소·돼지의 부산물을 받아 좌판을 벌이는 상인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축산물시장의 시작이었다.

지금 사람들이 ‘피다방’을 알까? ‘선지’가 아니라 새벽에 막 잡은 소가 쏟아내는 뜨끈뜨끈한 피를 한 대접에 얼마씩 받고 팔던 곳이었다. 도살장 옆이기에 가능했다. 고객들 중에는 폐병 등을 앓아 몸이 허약한 사람들도 있었지만 요즘 말로 ‘몸 만들기’가 중요한 프로레슬링 선수들도 있었다.

1960년대는 프로레슬링 전성시대였다. 이들은 양동이에 담겨 거품이 바글바글 나는 소피를 즉석에서 몇 사발씩 퍼마시고는 바로 옆의 우시장으로 뛰어가 수도(手刀)로 소머리를 내리쳐 살아 있는 소를 기절시킨 뒤 즉석에서 쇠뿔을 뽑는, 대단히 위험한 시범을 보이기도 했다. 우시장 주변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구경거리요, 영웅담이 탄생하는 현장이었다.

이렇게 소·돼지를 잡으면 모든 것이 돈이 됐다. 소와 돼지의 정육(精肉)은 물론이고, 각각의 머리와 뼈, 내장과 가죽, 지방과 피가 분리되어 팔려 나갔다. 지금도 마장동시장을 지나다 보면 소의 가죽과 살 사이에 딱히 비계도 아니고 살도 아닌 수구레를 벗겨 내는 광경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임꺽정이 먹었다는 ‘수구레국밥’의 재료다. 2차 상품으로 순대와 족발을 만들어 파는 곳도 당연히 있다.

그런가 하면 저렴한 말고기를 파는 골목이 시장 일각에 형성되기도 했다. 그것은 마장동이라는 동네 이름에 걸맞은 것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뚝섬경마장(1954∼1989)이 가까이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과 훨씬 더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쯤 되면 마장동은 축산물의 모든 것을 직접 보고 고르고 살 수 있으며, 나아가 그것을 즉석에서 구워 먹을 수도 있는 ‘원스톱 서비스’의 현장이라고 할 만하다. 그 양도 엄청나다. 2012년 현재 전국 축산물 유통량 가운데 마장동시장에서 거래되는 물량이 소는 9.8%(1만7411두), 돼지는 4.6%(9만3851두)였다.

전국에서 거래되는 쇠고기의 10분의 1가량이 마장동에서 소화되고 있다는 얘기다. 서울만으로 범위를 좁히면 그 비율은 60%가 넘는다. 집에서든, 식당에서든 쇠고기를 두 번 먹으면 그 가운데 적어도 한 번은 마장동시장을 통해 공급된 것이라는 얘기다. 이곳 상인들은 “단일 품목을 취급하는 시장으로는 마장동이 아시아 최대 규모”라고 말한다. 누가 그것을 일일이 따져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엄청난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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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장동 축산물시장의 내부 풍경. 캐노피가 씌워진 중앙통로로는 쇠고기와 돼지고기를 나르는 트럭, 오토바이, 자전거 등이 쉴 새 없이 지나간다. 이곳에 서면 시장의 활력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서울역사박물관 청계천문화관 제공

 

그렇다고 마장동이 늘 잘나갔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특히 1980년대 중반은 침체기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당국의 칼날이 마장동을 겨냥한 것이다. 외국인들에게 이런 전근대적인 도살 및 판매 현장을 보여줄 수 없다는 발상법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것은 일정 부분 마장동 상인들이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그때까지도 ‘밀도살’과 ‘물 먹인 소’는 마장동시장의 대명사이자 어두운 그늘이었다. 숙련된 기술자라면 소 한 마리를 잡아 발골(發骨)하고 분해한 뒤 현장을 흔적도 없이 치우기까지 30분이면 족했다. 그렇지만 경찰과 지방정부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마장동에서 그 현장을 잡아낼 수 있었다. 시쳇말로 당국의 ‘밥’이던 시절이었다. 겨우 그 어두운 터널을 지나고 일부 작업환경도 개선해 시장이 겨우 기지개를 켤 만 하던 1994년에 앞에 언급한 대로 성수대교가 무너졌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8년엔 마장동시장의 버팀목이던 도살장마저 문을 닫았다. 시장 전체에 위기감이 감돌았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모든 여건이 최악이던 상황에서 마장동시장은 오히려 다시 전성기를 맞았다. 1990년대 중반부터 쇠고기 소비량이 급격히 늘면서 소비 부위도 다양해지고 고급화됐다. 그 이전에 갈비, 등심, 안심 등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특별한 날에나 먹는 것이었고 평소에는 불고기가 쇠고기 소비의 최고 수준이었으나 이 무렵부터는 대중식당에서 구워 먹고(로스구이), 데쳐 먹고(샤부샤부), 무쳐 먹는(육회) 등의 온갖 방법이 일반화됐다. 무슨무슨 ‘가든’이 유행병처럼 곳곳에 들어섰다.

그렇다고 해서 그 늘어난 쇠고기 소비량이 모두 마장동시장의 몫일 리 없었다. 비슷한 시기에 일반화되기 시작한 대형마트가 축산물 소매시장 역할을 빼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잘 생각해 보라. 최근에 집에서 삼겹살을 구워 먹기 위해 마장동시장은커녕 동네 정육점이라도 찾아본 적이 있는지를. 열에 여덟 아홉은 대형마트를 이용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극적인 반전이 내재되어 있다. 대형마트라든가 단체급식회사 등 축산물 대량 소비처들이 직접 경매에 참여해 쇠고기를 조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마장동 상인들에게 그 역할을 부탁하고 나선 것이다. “역시 쇠고기·돼지고기를 볼 줄 아는 것은 마장동 사람들”이라는 얘기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반세기이상 축적된 ‘축산물 품질을 알아보는 눈’과 ‘좋은 품질의 축산물을 확보할 수 있는 능력’이 위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런 흐름은 지금까지 이어지며 마장동 상인들의 기를 한껏 세워 주고 있다.

이제 마장동 축산물시장에서는 소매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도매 또는 납품 기능이 훨씬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약 2000개 점포에 1만여 명의 상주인력이 제각기 33∼66㎡(10∼20평)의 좁은 공간에서 가공·저장·판매 활동을 집약적으로 하는 한편 그동안 쌓아 온 신뢰를 바탕으로 거래선을 유지하고 확장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새벽부터 오전까지가 그렇게 분주하다면 오후는 비교적 한산한 편이다. 그러다가 저녁 무렵이 되면 다시 한번 시장 풍경이 바뀐다. 최근 2, 3년 사이에 쾌적하고 저렴한 가격대의 정육식당들이 시장 곳곳에 들어서며 가족 또는 술꾼들의 회식 장소로 발돋움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런 고기를 이런 가격에…”라는 소리가 나오게끔 되어 있다.

마장동도 2003년 말을 기점으로 4, 5년 동안 광우병 파동의 여파를 피해 가지 못했으나 이제는 그것도 한때의 간주곡이었을 따름이다. 1970년 1.2㎏에 불과하던 쇠고기 1인당 소비량은 2011년 한반도 지역의 역사상 처음으로 10㎏을 돌파해 10.2㎏에 이르렀다. 그 흐름이 이어지는 한 마장동시장의 기능이 갑자기 수그러들 리는 없을 것 같다.

그렇다고 마장동시장의 미래가 꼭 밝기만 한 것은 아니다. 이제 마장동 상인들이 ‘백정’이라는 자격지심은 상당히 벗은 게 사실이다. 이들의 행동거지에서 “우리야말로 한국 사회가 돌아갈 수 있게 영양분을 공급해 주는 꼭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자부심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작업환경과 영업방식이 현대화되었다고 말하기는 쉽지 않다. 새벽 5시에 지방 경매장에서 실려 올라오는 지육(枝肉)을 받아 새김질하고 다듬어 소매로 내거나 거래처로 내보낸 뒤 오후 2, 3시쯤이면 퇴근하는 생활패턴은 1년 365일 똑같다. 계절에 관계없을 뿐 아니라, 올해가 지난해 같고 내년도 올해와 똑같을 수밖에 없다.

마장동 상인들과의 대화는 대개 이런 식이다. “내가 서울에 올라온 게 열여덟, 열아홉쯤 됐을 때인데, 아니 스무 살 때던가…”라거나, “그때 내가 서울 시내에 조그만 정육점을 서너 개쯤 운영했는데…”라는 투다. 객관화의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을 때 생길 수 있는 현상이다.

생활패턴상 다른 영역의 사람들과 어울리기가 쉽지 않다 보니 이 비좁은 시장 안에 친목계가 50개가 넘는다. 한 사람이 대여섯 개 모임에 중복 가입해 종으로 횡으로 엮여 있다. 안으로만 뭉치는 인적 관계망에 미래의 비전이 들어설 자리는 별로 없어 보인다.

그러다 보니 변화의 압력은 늘 ‘밖’에서 주어지곤 한다. 마장동 지역의 생태계를 구성했던 ‘삼두마차’ 가운데 우시장(1958∼1974)과 도살장(1961∼1998)은 없어진 지 오래다. 마지막 축산물시장(1961∼현재)조차 행정당국에겐 ‘눈엣가시’인 모양이다. 기회만 있으면 ‘도심부적격시설’이라는 딱지를 붙여 서울 외곽으로 내보내려 하곤 한다. 그때마다 ‘현대화’라는 명분도 빠지는 법이 없다.

그것이 누구에게 ‘적격’이고 누구에게 ‘부적격’인지 애매하기 짝이 없기도 하려니와, 영원히 ‘을’일 수밖에 없는 마장동시장 상인들로선 그런 계획이 한번 나올 때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곤 한다. 시장을 아예 들어 딴 곳으로 옮기든, 아니면 그 자리에 완전히 새로운 건물을 짓는 방식으로 현대화하든 반세기 이상 동안 쌓고 엮여 온 네트워크가 복구 불가능할 정도로 부서질 것은 불문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21세기의 마장동시장은, 우리의 삶이 그렇듯, 고해(苦海) 위에 떠 있는 외로운 섬이다.

마장동시장에 한번 가보라. 그곳엔 동물의 기름과 피가 어우러져 만들어 내는 미묘한 냄새와 이마에 땀방울을 송골송골 매달고 커다란 지육 덩어리를 다듬는 남성적 활력이 골목마다 넘쳐날 것이다. 우리가 이미 잊었거나, 최소한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풍경들이다. 그러다 날이 저문 뒤 그런 풍경들 속의 한 귀퉁이에 자리 잡고 돼지고기라도 몇 점 굽게 되면 자신이 거쳐 온 삶의 굴곡과 그 굽이굽이의 음영이 마장동시장 상인들의 그것과 문득 겹쳐 보일지도 모른다.

 

김창희 / 통의도시연구소 이사 ‘오래된 서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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