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玉流따라 열리던 詩會… ‘조선 르네상스’ 산실로 불리던 동네

다음의 글은 2014년 5월 9일 문화일보에  ”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405090103313024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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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까지 옥인동 동네 주민들의 식수로 사용되던 가재우물. 옥류동 계곡에 이 우물을 판 노가재(老稼齋) 김창업과 그의 형 삼연(三淵) 김창흡은 ‘도시의 은둔자’로 살면서도 겸재 정선을 길러내는 등 ‘열린 정신’의 소유자였다. 김영상 사진

 

참 을씨년스러운 동네다. 서울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인왕산 자락의 야트막한 언덕과 아담한 계곡을 끼고 있어 아침 햇살 속에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맛이 일품이던 곳이지만 지금은 그런 정취를 찾을 길이 없다. 정취는 고사하고 한두 집 걸러 빈집이고, 서너 집 걸러 폐허다. 골목에서 풍겨나는 쇠락한 기운이 그곳으로 선뜻 발걸음을 들여놓기 어렵게 한다.

옛 지명으로 ‘옥류동(玉流洞)’인 서울 종로구 옥인동 47번지의 모습이 이렇다. 2007년 이 일대 9000여 평이 ‘옥인 제1주택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된 지 8년째다. 당연히 그동안 증개축이 금지됐다. 지금도 재개발조합과 서울시 사이에 소송이 걸려 있어 언제쯤 이 동네가 고즈넉한 맛과 사람 사는 냄새를 되찾게 될지 기약할 수 없다. 옛 명성을 듣고 이 동네의 골목길과 옛집을 답사라도 할라 치면 큰맘 먹어야 한다. “어디서 왔냐?” “빈집 옆에 사는 사람 심정을 한번 생각해봤냐?”는 등의 날 선 반응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본래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가장 아늑한 주거지인 동시에 가장 개방적인 문화의 발신지로 꼽혔지만 이제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는 것이다. 너무 좋은 장소였기 때문일까? 그래서 너무도 대단한 사람들의 손을 타다 보니 정취를 잃게 된 것일까?

사실 지금 이 동네에는 낡은 가옥 150여 채뿐 이렇다 할 역사적·문화적 랜드마크가 없다. 동네 중심지의 옥류천은 복개되어 그 자연스러운 곡선을 숨겼고, 역사에 이 동네의 첫 소유자로 기록된 김수항(1629∼1689·김상헌의 손자)이 말년에 세운 육청헌(六靑軒)과 청휘각(晴暉閣)도 그 자리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현재 확인되는 유적으로는 김수항의 넷째 아들 김창업(1658∼1721)이 팠다는 가재우물(옥인동 47-376)과 이 동네의 마지막 소유자인 친일파 윤덕영(1873∼1940)이 신축한 한옥 살림집(옥인동 47-133) 정도다.

그나마 가재우물은 해방 후 이 동네에 빈틈만 있으면 마구 밀고 들어선 주택들이 그 위를 타고 앉는 바람에 보일러실인지 창고인지 알 수 없는 처참한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건평만 77평에 이르는 윤덕영의 살림집 역시 세입자 대여섯 가구가 어울려 살며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아 문화재 지정과 해제를 반복하고 있다. 이 동네의 현 상태가 재개발 여부로 어수선한 것만큼이나 근현대사가 남긴 족적도 이렇게 갈피를 잡을 수 없게 혼란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볼품없는 옥인동 47번지 일대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 장소가 그 내부에 차곡차곡 쌓아 온 역사적 지층의 다양성부터 언급되어야 한다.

조선 중기에는 김수항과 그 아들 등 사대부정신의 사표가 되어 온 안동김씨 일문의 터전으로, 후기에는 중인들의 시회 장소로 각각 각광을 받았다. 그런가 하면 1817년엔 왕족의 후예인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이들 중인들의 활동에 대한 오마주(hommage)로 옥인동의 한 바위에 ‘송석원(松石園)’이라는 큼지막한 휘호를 남기기도 했다. 말하자면 조선 중후기의 문화적 역량이 서로서로를 부추기며 차고 흘러넘치는 현장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이곳은 숙종∼영·정조 대의 ‘조선 르네상스’가 배태되고 성장한 공간들 가운데 하나였다. 김상용·김상헌 등 선대에 목숨 걸고 지킨 ‘충절’과 ‘의리’의 사대부정신이 이곳 옥류동 계곡에서 후손들의 맑고 개방적인 학문과 예술로 꽃을 피운 것이다.

원래 김상헌은 장의동(지금의 청와대 자리)에 단청도 올리지 않은 ‘무속헌(無俗軒)’이라는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병자호란 뒤 심양에 잡혀가 있으면서 이 집을 ‘맑고 시원한(淸) 곳’이라고 읊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단종이 삼촌에게 쫓겨나 유배됐던 영월의 ‘청령포(淸浦)’와 같은 표현이다.

그 무속헌에 살던 김수항이 옥류동으로 옮겨 앉으며 지은 정자 ‘청휘각’도 예사롭지 않다. ‘비 갤 청(晴)’에 ‘햇살 휘(暉)’. 비가 내리다 막 갠 뒤 햇살이 쨍하고 나는 상황, 누구나 원하는 정경이다. 날씨뿐 아니라 나랏일도, 개인의 처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동-서인과 노-소론의 대립 속에 이 집안이 꼭 그렇게 되지는 않아 몇 차례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거친 뒤 셋째 김창흡(1653∼1722)과 넷째 김창업은 벼슬길을 포기하고 옥류동과 장의동을 오가며 학문과 후진 양성에 주력했다. 맑은 정신의 ‘시은(市隱)’, 곧 ‘도시의 은둔자’로 산 것이다.

그렇다고 그런 은둔의 삶이 곧 세상과의 단절은 아니었다. 이 두 사람은 노론이면서도 다른 학문 경향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고, 문학과 미술 등 예술 분야에서도 자신의 정서를 한껏 펼칠 줄 알았다. 제자들 중엔 중인들도 있었다. 균형감각과 평상심을 잃지 않고, 거기에 더해 세상에 열린 자세로 살려고 노력한 것이다. 두 형제의 문하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의 정점을 이룬 겸재 정선 같은 걸출한 화가가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두 형제가 세상을 떠나고 60여 년이 흐른 뒤 옥류동에서는 전혀 예상 못했던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그 일대의 중인 지식인들이 ‘옥계시사’를 결성하고 바로 그 옥류동 계곡에서 시회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천수경(1758∼1818), 장혼(1759∼1828) 등이 주인공이었다. 그 무렵은 이들 말고도 여러 중인 시모임들이 절정에 이른 때였다.

천수경 등은 김수항 이후의 안동김씨들과 옥류동 계곡에서 공존하는 처지였다. 이를 증명하는 한 쌍의 그림이 남아 있다. 1791년 유두날(음력 6월 15일), 그때는 ‘송석원시사’로 이름을 바꾼 이들 그룹이 옥류동 초입에서 시회를 열었다. 장마철이다 보니 낮에 한 차례 비가 왔던 모양이다. 할 수 없이 헤어졌지만 저녁 무렵 비가 그치자 아쉬운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이들은 한밤중에 술을 한 병씩 꿰차고 이번에는 옥류동 계곡의 가장 깊은 곳 언덕 위로 모여들었다. 구름 속에서 어슴푸레 빛나는 보름달이 시인 묵객들을 꿈결 속의 인물들로 만들었으리라.

바로 그날 낮의 시회는 당대의 화원 이인문이, 밤의 술모임은 이인문과 동갑인 화원 김홍도가 각각 그림으로 남겼다. 역시 중인이던 두 화원은 시회 모임에 동행하지는 않았고 나중에 주문에 의해 그림을 남겼던 것 같다. 그만큼 중인 계층이 사회경제적으로 성장했다는 얘기다. 낮의 장면은 ‘송석원시회(詩會)도’라고, 밤의 장면은 ‘송석원시사야연(夜宴)도’라고 후세 사람들이 각각 화제를 달았다. 지금 봐도 신품(神品)이라 할 만하다.

여기서 그림에 대한 평가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중인 그룹이 옥류동 초입부터 최상단까지 물길을 따라 마음껏 휘젓고 다녔다는 점이다. 안동김씨들의 주택과 마당 안에까지 들어가지야 않았겠지만 그 주위의 계곡 여기저기에서, 많을 경우 수백 명씩 모여 ‘백전(白戰)’이라는 시회를 열곤 했다. 요즘 백일장(白日場)과 같은 말이다. 그러나 그런 일로 안동김씨 사대부들과 중인들 사이에 시비가 붙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우리는 조선시대에 계층의 벽을 넘어 ‘은둔’과 ‘개방’과 ‘공존’의 가치가 이토록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장소를 옥류동 이외에 달리 찾아볼 수 없다.

한 가지 더. 원래 ‘송석원’은 앞서 언급한 중인 시회의 맹주 천수경의 당호였다. 그러던 것이 그 모임의 이름이 되더니, 나아가 모임이 수십 년 계속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옥류동의 별칭으로까지 발전했다. 중인의 당호가 3중의 의미를 획득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역사에서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중인의 승리’였다. 김정희가 이들이 1791년 유두날 낮에 모였던 장소 근처에 ‘송석원’이라는 큰 바위글씨를 남긴 일 역시 그 의미를 생각하면 감격적이기까지 하다.

그러나 모든 일이 오래 가서 꼭 좋은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옥류동에 흘러넘치던 새로운 시대정신과 그윽한 문향도 세월이 가면서 이울었다. 안동김씨들은 순조-헌종-철종 내리 3대의 왕비를 배출하며 60년 세도정치의 문을 열어젖혔다. 그것은 19세기 한국정치가 불임의 시대로 들어서는 도화선이었다.

옥류동의 처지 역시 비슷했다. 이곳에 깃들던 개방적이고 개혁적인 중인들의 모임도 19세기 중반 청계천 근처로 근거지를 옮겨갔다. 옥류동은 본래의 의미를 잃고 대저택의 장소로만 남았다. 아무래도 장소성(placeness)이란 그 핵심이 물리적인 장소보다 그 장소를 경영하는 사람에게 있는 모양이다.

고종 등극 이후 1870년대엔 여흥민씨 처족들 가운데 민태호-민규호 형제가 이 지역을 물려받았다. 명분은 ‘가재우물의 샘물을 마시고 싶다’는 것이었다. 강탈이나 다름없었다. 1882년 민태호의 딸이 세자빈으로 간택됐다. “바야흐로 간택되어 입궁하기 직전에 민태호는 초조하여 송석원을 닫고 손님을 사양했다. 국혼이 정해지자 비로소 대문을 열고 하객을 맞는데 눈썹 사이에 기쁨이 흘러넘쳤다.”(‘매천야록’)

그런 기쁨도 잠시, 순종 등극 전인 1904년 민태호의 딸이 죽고 말았다. 여흥민씨 세도의 끝이었다. 공교롭게도 그 다음 옥류동을 차지한 것은 1906년 새 황태자비를 배출한 해평윤씨 가문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후 윤씨의 큰아버지 윤덕영이 1910년 말 이곳을 차지한 것이다. 그는 순종의 시종원경으로서 을사늑약과 합방조약의 체결에 최고 수준의 친일을 한 인물이었다. 이완용에 비해 품계와 연배가 낮다 보니 덜 부각되었을 뿐이다.

옥류동, 즉 송석원은 이렇게 시들어 갔다. 왕실 처족이 줄줄이 들어서니 내방객들이야 많았겠지만 그것은 대개 일가붙이나 매관 청탁자들이었을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윤덕영이 프랑스 귀족의 설계도를 구해 벽수산장이라는 건평 800평 가까운 석조건물을 옥류동 언덕 위에 지으며 동네 풍경이 완전히 바뀌었다. 경복궁이 내려다보이는 위치의 이 ‘한양 아방궁’은 그 자체로 나라가 망했음을 웅변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옥류동은 세도정치의 전리품으로 전락한 데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나라 도둑질의 부산물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모든 것이 끝이었다. 해방으로 적산이 된 옥류동 지역엔 피난민들이 판잣집을 짓고 우후죽순 격으로 몰려들었다. 그 뒤 양성화되긴 했지만 질서가 있어 보이진 않는다. 그저 다행이라면 이 동네가 청와대 옆이다 보니 고도제한 때문에 재벌의 눈길을 받지 않은 점이다. 경제성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소 무질서한 동네이면서도 서민들이 밀집해 사는 아늑한 맛만은 간직할 수 있었다.
이런 옥인동 주변에 몇몇 주목할 만한 현대사의 흔적이 흩뿌려져 있는 점도 지나칠 수 없다. 우선 진보적 민족주의자 이여성(1901∼?)이다. 그는 일제시대에 언론인으로서 ‘숫자조선연구’(전 5권)라는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해직된 뒤엔 옥류동 계곡 초입의 옥인동 56번지(지금 세종아파트 자리)에 칩거하며 ‘조선복식고’라는 전대미문의 영역을 개척하는가 하면 여운형의 건국동맹에도 가담했다.

1940년대 초 어느날 이여성의 집 2층 발코니에 그가 고증한 삼국시대 의상을 차려입은 이화여전 학생들이 줄지어 나타났다. 그의 저서에 실릴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주민들 입장에서는 엄청난 볼거리이자 옛 영화의 환생이었다. 이 이벤트는 우리나라 최초의 옥외패션쇼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또 한 가지는 화가 박노수(1927∼2013)의 주택이다가 최근 그의 기념관으로 개관한 종로구립미술관(옥인동 168-2)이다. 이 집은 윤덕영이 딸 부부를 위해 옥류동과 이웃 인왕동 경계(이 두 동네가 일제시대에 ‘옥인동’으로 통합됐다!)에 1930년대에 지어준 집이었다. 예쁘장하고 견고한 목조주택이다. 그러던 것을 1970년대에 박 화백이 매입해 30여 년을 살다 지방자치단체에 자신의 작품들과 함께 기증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옥인동엔 친일과 반일의 기운이 교차하는가 하면, 지금껏 자기표현에 능한 예술가들이 끊임없이 찾는 지역으로 명맥이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앞으로 이 지역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한 가지 기대가 있다면, 앞으로 재개발이 되든 그렇지 않든,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100여 년의 쓰라린 역사를 뛰어넘어 옥류동 본래의 ‘은둔’과 ‘개방’과 ‘공존’의 정신을 되살리는 방법이 강구되기를 바랄 뿐이다. 당장은 눈에 보이지 않을지라도 그 장소가 간직했던 의미와 아름다움을 찾아가면 좋겠다는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이 을씨년스러운 옥인동 47번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나라 국토를 돼지 내장 삶아 까뒤집듯 헤집어놓지 않고서는 속이 풀리지 않는 재개발·재건축의 광풍에서 서울, 아니 나라 전체를 구하는 길일 수도 있다.

 

김창희

통의도시연구소 이사

‘오래된 서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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